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韩国的传统文化文化 |
3.한국의 장빙문화화와 창녕 석빙고(韩国的藏冰文化和昌宁石冰库)
(1.) 석빙고란?
석빙고란 겨울에 얼음을 채빙하여, 태양열과 직사광선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여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창고인데,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을 경사지게 해 얼음에서 녹아내린 물이 밖으로 나가도록 중앙에 배수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2.)석빙고의 유래>
석빙고의 유래는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노례왕(24~57년)때 이미 얼음창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도 지증왕 6년(505년)에 얼음을 보관토록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3.)석빙고의 특징
석빙고의 규모는 대부분 30평 이상, 적은 경우에도 10평이 넘었다. 석빙고에 저장하는 얼음의 두께는 12cm이상이 되어야만 했다.
빙고의 바닥은 흙다짐이나 흙다짐 위에 넓은 돌을 깔아 놓았고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어 얼음이 녹아서 생긴 물이 자연 배수되게 했다. 빙고 구조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빙실 천장을 아치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 형식은 전체를 아치로 만든 구름다리나 성문들과는 달리 일정 간격으로 세우고 이를 구조재로 해 그 사이를 석재로 쌓거나 판석을 얹었다. 석재는 화강석으로 규적은 대체로 0.5톤 정도. 석빙고 건축 때 철물과 회를 많이 사용했는데 철물은 석재와 석재 사이가 서로 분리되지 않도록 삽입했다. 회를 많이 사용한 것은 봉토 조성 때 진흙과 함께 혼합해 외부에서 물이나 습기가 침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용도였다. 천장에는 빙실 규모에 따라 환기구멍을 만들었다. 환기공은 봉토 밖으로 나오게 해 그 위에 환기공보다 큰 개석을 얹어 빗물이나 직사광선이 들어가지 않게 했다.
(4.)석빙고의 우수성
석빙고는 열 전달율이 높은 화강암으로 내부를 만들고, 외기가 쉽사리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위하여 열 전달율이 낮은 진흙과 석회등으로 지붕을 덮어 단열을 시키고, 잔디를 식재하여 태양열 복사로 인하여 지표가 뜨거워지지 않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입구에는 벽을 설치하여 안으로 유입된 더운공기가 석빙고 상부쪽으로 대류시켰고, 유입된 공기가 대류하면서 실내의 차가운 공기와 부딪친다음 석빙고 내의 얼음에 닿도록 하여, 더운공기때문에 얼음이 빨리 녹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얼음이 전혀 안녹는건 아니죠. 얼음이 녹으면 그 녹은 물은 빨리 석빙고에서 빼내는것도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석빙고 바닥에는 경사진 배수로가 나 있습니다.
즉 외부에 있는 얼음이 내부의 얼음을 보호하는 방법이죠. 얼음이 녹으면서 빼았아가는 기화열을 이용한거지요.
석빙고는 기체대류, 열전달율, 태양열복사 등을 이용한 상당히 과학적인 시설물입니다.
(5.) 석빙고의 원리
우리 선조 들은 매년 2월말 강가에서 얼음을 14센티미터 이상의 두께로 잘라서 저장한 뒤 6월부터 10월까지 수시로 그 얼음을 다시 꺼내 더위를 물리쳤었다.
석빙고는 현재 6개가 존재하며 모두 18세기에 만들어져 경북 경주, 경남 창녕 등 경상도 지역에 몰려 있다. 반 지하에 내부 공간은 12 미터 , 폭 5미터, 높이 5미터 안팎이다.
우선 석빙고의 얼음 저장은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1단계는 얼음 저장에 앞서 겨울 내내 내부를 냉각시키는 것이고, 2단계는 얼음을 넣은 뒤 7,8개월 동안 차갑게 유지하는 것이다.
우선 1단계에서 냉각을 시킨 방법의 열쇠는 바로 출입문 옆에 붙어있는 날개 벽이다. 겨울에 부는 찬바람은 이 날개 벽에 부딪쳐 소용돌이로 변한다. 소용돌이는 빠르고 힘차게 석빙고 내부 깊은 곳까지 밀고 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겨울에 찬 기온을 유지하는 것이다. 실제로 겨울철 보통 지하실 온도는 15℃ 인데 비하여 석빙고 내부 기온은 평균 영하0.5-영상2도라고 한다.
그 다음 단계는 얼음을 어떻게 보존하는가인데 실재로 석빙고 안의 얼음은 녹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거의 미미할 정도로 녹았을 뿐이다. 이렇게 찬 기온을 유지한 데는 3가지 열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절묘한 천장 구조이다. 화강암의 천장은 1-2 미터의 간격을 두고 4.5개의 이치형 모양으로 만들어져 그 사이에는 움푹 들어간 빈 공간이 있다. 이곳이 바로 내부의 더운 공기를 빼내는 일종의 에어포켓인 것이다.
두 번째는 바로 환기구이다. 위쪽에 설치된 환기구는 에어포켓에 갇힌 더운 공기를 밖으로 빼낸다. 이것은 바로 더운 공기는 위로 뜬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석빙고 내부의 온도는 한여름에도 0도 안팎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다 3번째는 얼음에 치명적인 물과 습기를 빠르게 밖으로 빼내는 배수로이다. 또한 빗물을 막기 위하여 석빙고 외부에 석회와 진흙으로 방수층을 만들었다. 그리고 얼음과 벽 및 천장 틈 사이에는 밀집, 왕겨, 톱밥 등을 단열재로 채워 넣어 외부열기를 차단하였다. 거기에다 외부의 잔디는 햇빛을 흐트러뜨려 열 전달을 방해하는 효과가 있으니 석빙고의 얼음은 한여름에도 거의 녹지 않고 견디었던 것이다.
(6.)창녕석빙고
1.)종 목 보물 310호
명 칭 창녕석빙고(昌寧石氷庫)
분 류 석빙고
수 량 1기
지정일 1963.01.21
소재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288
시
소유자 국유
관리자 창녕군
창녕군 교육청 앞의 개울 건너편에 언덕처럼 보이는 것이 이 석빙고이다.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해 두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로, 주로 강이나 개울 주변에 만들어진다.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이 되도록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를 남쪽으로 내어 얼음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입구 안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밑바닥은 경사졌고 북쪽 구석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구멍을 두었으며, 바닥은 네모나고 평평하다. 내부는 잘 다듬어진 돌을 쌓아 양옆에서 틀어올린 4개의 무지개모양 띠를 중간중간에 두었다. 각 띠사이는 긴 돌을 가로로 걸쳐놓아 천장을 마무리하였다. 또한 천장의 곳곳에는 환기구멍을 두어 바깥공기를 드나들게 하였다.
이 석빙고는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의 기록을 통해 조선 영조 18년(1742) 당시 이곳의 현감이었던 신후서(申侯曙)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알수 있다. 각 부 양식 또한 조선 후기의 모습이 잘 담겨져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2.) 창녕석빙고 구조
표면의 높이는 5.4m, 전체 길이는 13m이다. 빙실의 입구는 남쪽에 설치하였는데 좌우에 장대석(長大石)을 3단씩 쌓아서 벽을 축조하고 그 위에 1매의 장대석을 놓아 미석(楣石)을 삼았으므로 입구는 방형을 이루고 있다. 내부는 연석(鍊石)으로 4개의 홍예(紅霓)를 틀어 올리고 홍예 사이에는 장대석을 옆으로 건너질러 쌓아올려서 천장을 구성하였으며, 그 사이의 천장에는 외부로 통하는 환기공이 설치되었다.
4.진흥왕의 업적과 창녕비(真兴王的业绩与昌宁碑)
소개:
원래 화왕산 기슭에 있던 것이 소풍 갔던 학생에게 발견되어 알려졌는데, 학계에 보고된 것은 1914년 2월7일 창녕 초등학교 일본인 교장 하시모토(橋本良臧)에 의해서 였다. 그 후 1924년 지금의 만옥정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경(巡狩管境)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拓境碑)라 일컫는다.순수의 기원은 중국의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는데 중국의 황제들이 자신의 영토를 둘러보고 그 곳에서 천신께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순수한 기념으로 비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진나라 시황제(BC.259∼BC.210)부터라고 한다.이 비는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개석(蓋石)이나 대석(臺石)을 사용하지 않은 삼국시대 비문의 일반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한 면을 간 다음 바깥 면 비석의 형상에 따라 음각의 줄을 돌렸는데 오른쪽 상부는 암석이 사면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일행(一行)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비문은 27행으로 한 행의 자수(字數)는 일정하지 않아 끝 행은 3자 뿐인 것도 있으나 26자의 행이 가장 많고 후반부는 위에서 2행마다 1자식 낮추어져 있다.비문의 내용은 순수의 년시(신사년 2월), 사적, 수가인물(수행원)의 3부분으로 되어있고 인물의 기록순서는 속부, 인명, 직관, 직위를 표기하여 삼국시대 신라비문의 일반적 형식을 따르고 있다.서체는 해서체이며 글자간격은 4㎝이다. 앞부분이 마멸되어 자획(字劃)이 불분명한 점이 있다.
(1.)창녕비가 있는곳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2.)창녕비를 세운 이유(계기)
빛벌가야(지금의 창녕)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함)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3.)창녕비가 세워진 때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진흥왕 22년(561)에 비를 세웠다.
4.창녕비의 특징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5.창녕비의 사진
5.한국의 다리와 영산 만년교(韩国的桥梁与灵山万年桥)
(1.) 다리:
다리에 관한 역사를 기록상으로 볼 때, 본격적이고 진보된 기술로 짜임새 있게 다리가 만들어지기는 삼국시대부터이다. 기록상 최초의 다리 공사는 413년(실성이사금 12)에 완성된 평양주대교(平壤州大橋)로, 그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로는 상당히 대대적인 공사를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석조 아치교는 신라의 청운교와 백운교인데, 751(경덕왕 10)∼774년(혜공왕 10)에 김대성(金大成)이 불국사(佛國寺)와 함께 창건하였다. 고려시대의 다리로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선죽교(善竹橋)를 꼽을 수 있으며, 고려 말엽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가 이성계(李成桂) 일파에게 피살되어 순사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다리는 석교(石橋)이며, 또한 특기할 것은 단순교(單純橋)로는 세계 최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다리라는 점이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돌다리로서 남한(南韓)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교량은 함평(咸平)에 있는 다리인데, 문헌상의 이름은 고막교(古幕橋)이고, 구전(口傳)으로는 독다리라고 한다. 이 다리는 1274년(고려 원종 15) 고막대사(古幕大師)가 가설하였는데, 길이가 약 20 m, 너비 3.5 m이다. 투박한 인상을 주는 다리인데 다듬지 않은 돌기둥을 간결하게 세우고, 그 위에 노면을 만들어 놓은 평교(平橋) 형식의 수수한 다리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다리로는 서울 장충단공원(奬忠壇公園) 입구 개천 위에 놓인 수표교(水標橋)가 있다. 세종(世宗) 때 가설된 것으로 원래는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이전되었으며,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표교는 청계천에 놓였던 7개의 다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석교이며 평교 형식의 다리이다.
또한 1760년(영조 36)에 이 수표교 앞 개천 복판에
석주(石柱)를 세워 10자(303 cm)까지 눈금을 새기고
물이 불어나는 상황을 관찰하였고, 개천 바닥을
교각에 표시하여 수심(水深)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수표교는 다리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수량(水量)을 측정하는 과학적인 기능도 지니고
있어 사료적(史料的)으로도 매우 귀중한 것이다.
(2.) 영산 만년교
종목 : 보물 제564호
분류 :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교통/ 교량
수량 : 1기
지정일 : 1972.03.02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영산면 동리 455
시대 : 시대미상
소유자 : 국유
관리자 : 창녕군
마을 실개천 위에 무지개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돌다리로, 실개천이 남산에서 흘러내린다 하여 ‘남천교(南川橋)’ 라고도 불리운다.
개천 양쪽의 자연 암반을 바닥돌로 삼고 그 위에 잘 다듬어진 화강암 석재를 층층이 쌓아 무지개 모양의 홍예(紅霓)를 이루고 있다.
그 위로는 둥글둥글한 자연석을 쌓아 올리고 맨 위에 얇게 흙을 깔아 다리 위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놓았다.
노면은 곡선을 그리며 양 끝을 길게 늘이고 있어 다리의 분위기를 한결 아늑하게 해준다.
조선 정조 4년(1780)에 처음 쌓은 것을 고종
29년(1892)에 다시 쌓아 놓은 것으로, 지금도 마을
사람들이 통행할 만큼 튼튼하여 홍수 등에도 전혀
피해가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