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职棒联盟开拓者 朴赞浩跑完19年征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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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赞浩1994年进军美国职棒大联盟。作为第一个进军美国职棒大联盟的韩国人,朴赞浩并不仅仅是一位棒球运动员。他是对陌生的美国职棒大联盟舞台发起挑战的开拓者,也是众多青年的榜样。上世纪90年代末,韩国陷入金融危机泥淖而全体人民低迷消沉时,韩国人从朴赞浩的精彩比赛中获安慰。
◇公州少年挺进美国职棒大联盟
朴赞浩1973年出生于忠清南道公州市,是三儿一女中的小儿子。在公州中洞小学读四年级时,朴赞浩在棒球队教练的建议下从田径队转到棒球队,开始学习棒球。朴赞浩后来说:“当时看到棒球队队员们每天都在运动场上煮方便面吃。好像是我也想吃方便面所以才加入棒球队。”
刚开始做内野手的朴赞浩在进入公州初中后改变位置,开始做投手。天生的肩部条件再加上后天的努力,朴赞浩的投球速度越来越快。朴赞浩回忆说:“每天一睁眼就做100个俯卧撑,而且一有时间就会做引体向上,锻炼手臂和肩膀。”
- ▲“韩国特级”朴赞浩29日通过球队宣布退役。朴赞浩1994年成为第一个进军美国职棒大联盟的韩国人,并在17年时间里创下亚洲球员获胜场次最多(124场)纪录,成为韩国的“国民英雄”。图为,今年6月10日在大田球场对阵耐克森英雄队的比赛中,朴赞浩向欢呼的球迷致意。朝鲜日报记者 摄影
第二年1月,朴赞浩与洛杉矶道奇队签约,合同金额为120万美元(按照当时汇率约合10亿韩元)。当时的朴赞浩是汉阳大学二年级学生。
◇朴赞浩成为洛杉矶道奇队的超级明星
美国职棒大联盟并非安逸之地。在1994赛季初的两场比赛中,朴赞浩出场4局失5分(平均责任失分11.25分),结果被转到职业棒球小联盟。洛杉矶道奇队1996年重新将朴赞浩召回大联盟。
- ▲左图为,朴赞浩在比赛前向主裁判进行韩国式的问候。这是美国职棒大联盟赛场上过去未曾有过的场面。右上图为,朴赞浩1994年加盟洛杉矶道奇队时举行入队仪式。“61号传奇”自此拉开帷幕。右下图为,朴赞浩2005年11月在夏威夷举行婚礼。照片=美联社、Getty Images Multibits、韩联社
朴赞浩于1997年大放异彩。他创下了两位数的获胜场次(14胜8负),和同队的野茂英雄(日本,14胜12负)并驾齐驱。从这一年开始,朴赞浩的获胜场次连续5年突破10场。1998年曼谷亚运会上,朴赞浩带领韩国男棒获得金牌。因此而被免除兵役义务的朴赞浩从此走上一片坦途。
2001年,朴赞浩在出道后首次入选美国职棒大联盟全明星赛。这令他身价暴涨。2001赛季后获得自由球员(FA)资格的朴赞浩转会到德克萨斯骑警队,5年薪酬为6500万美元。当时这是德克萨斯骑警队历任投手中的最高身价。
◇伤病困扰中创造124胜战绩
如果说在洛杉矶道奇队是享尽荣耀,在德克萨斯骑警队就是历尽磨练。2002赛季开始之前朴赞浩就饱受右大腿筋伤病的困扰。他当年的成绩是9胜8负。2003年(1胜3负)和2004年(4胜7负)的成绩更是惨不忍睹。效力于道奇队时困扰他的腰伤也开始复发。
结果,在2005赛季中,朴赞浩被转到圣地亚哥教士队。朴赞浩在这个赛季获得12胜(8负),似乎已经东山再起。但从2007年开始,他的前进道路再次布满荆棘。朴赞浩开始辗转于纽约大都会队(2007年)、道奇队(2008年)和费城人队(2009年)。
2009年和2010年,朴赞浩收获了最后的礼物。2009年朴赞浩作为费城人队球员首次登上世界职业棒球大赛的舞台,第二年他经过纽约洋基队进入匹兹堡海盗队,并在这里使自己在美国职棒大联盟的胜场达到124场。朴赞浩超越野茂英雄(123胜),成为美国职棒大联盟中胜场最多的亚洲选手。此后,朴赞浩离开了自己献出17年宝贵青春的美国职棒大联盟赛场。
◇朴赞浩将何去何从?
朴赞浩最后选择韩国职棒作为自己棒球生涯的最后舞台,在此之前他于去年在日本欧力士野牛队效力了一年。朴赞浩要求韩华球队将提供给他的6亿多韩元年薪全部用作青少年和业余爱好者棒球发展基金。他还表示,将捐出韩国棒球委员会(KBO)规定的最低年薪(2400万韩元)。
- ▲图为,朴赞浩1994年加入洛杉矶道奇队时的面貌。
朴赞浩加盟的韩华队顿时成为最大关注焦点。虽然鼎盛期已过,但国民依然非常关注朴赞浩。今年年初朴赞浩出场的比赛门票连续7场被抢购一空,使韩国职棒观众突破700万的时代提前到来。虽然年近不惑,但朴赞浩仍宝刀未老。他今年的最终成绩为5胜10负,平均责任失分5.06分。加上在美国、日本的战绩,他创下了130胜(113负)的纪录。
韩华队原本希望朴赞浩明年继续留在队里。韩华队的年轻队员们也一致挽留朴赞浩。朴赞浩从11月初开始在美国待了三周时间,反复思考这个问题。据说,经过个人训练,他的身体状态反而比过去几年更好,所以也在退役问题上有所犹豫。但他最终还是选择了激流勇退。
朴赞浩30日上午在首尔中区广场酒店举行记者会公开今后的计划。在棒球赛场上征战19年的朴赞浩梦想的第二段人生是什么样子呢?
박찬호 은퇴 선언… 메이저리그 '동양인 최다' 124승 등 기록
94년 한국인 첫 메이저리그行 97년부터 5년간 두자릿수 승리
IMF시절 국민에 희망 심어줘, 오늘 기자회견… 거취 밝힐 듯
'코리안 특급' 박찬호(39)가 마운드를 떠난다. 미국 메이저리그와 일본·한국 프로야구 무대에서 19년간 투수로 활약했던 박찬호가
29일 한화 구단을 통해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가 등번호 61번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서는 모습도 이젠 볼 수
없게 됐다.
1994년 한국인으로는 처음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던 박찬호는 단순한 야구 선수가 아니었다. 낯선 메이저리그 무대에 도전한
개척자였고, 야구 선수뿐 아니라 숱한 청년들의 롤모델이었다. IMF 외환 위기로 침체에 빠졌던 1990년대 말에는 온
국민이 박찬호의 활약을 지켜보며 힘을 얻었다.
◇공주 소년, 메이저리그에 가다
박찬호는 1973년 충남 공주에서 3남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공주 중동초 시절 원래 육상부였던 박찬호는 야구부
감독의 권유로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박찬호는 훗날 "야구부원들이 매일 운동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을
봤다"며 "나도 라면이 먹고 싶어서 야구를 시작한 것 같다"고 했다.
내야수로 시작했던 박찬호는 공주중 입학 후 투수로 포지션을 바꿨다. 타고난 어깨에 노력이 더해져 나날이 공이 빨라졌다.
박찬호는 "매일 눈을 뜨자마자 팔굽혀펴기를 100개씩 했고, 틈만 나면 턱걸이로 팔과 어깨를 단련했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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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chosun.com/cs/article/2011/icon_img_caption.jpg朴赞浩跑完19年征程" TITLE="美职棒联盟开拓者
朴赞浩跑完19年征程" /> '코리안 특급'박찬호(한화)가 29일 구단을 통해 은퇴 의사를 밝혔다. 박찬호는 1994년 국내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17년간 동양인 최다승(124승) 기록을 세우며 국민적 영웅이 됐다. 사진은 박찬호가 지난 6월 10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넥센전에서 팬들의 환호에 답하는 모습. /전준엽 기자
고교 시절 박찬호는 '공은 빠르지만 제구력이 불안한' 투수였다. 박찬호의 대학 동기(92학번) 중에는 임선동·조성민
등 초고교급으로 평가받던 투수들이 많았다. 그런 박찬호가 미국 스카우트들에게 포착된 것은 1993년 미국 버펄로
유니버시아드대회였다. 박찬호의 150㎞대 강속구를 눈여겨본 것이다.
이듬해 1월 박찬호는 LA 다저스와 계약금 120만달러(당시 환율로 약 10억원)에 입단 계약을 맺었다. 박찬호는 한양대
2학년이었다.
◇박찬호, LA 다저스의 수퍼 스타로
메이저리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박찬호는 1994시즌 초 두 경기에서 4이닝 5실점(평균
자책 11.25점)을 기록하고 마이너리그로 밀려났다. 다저스는 1996년 박찬호를 다시 메이저리그로 불러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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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chosun.com/cs/article/2011/icon_img_caption.jpg朴赞浩跑完19年征程" TITLE="美职棒联盟开拓者
朴赞浩跑完19年征程" /> (왼쪽)'한국식 인사'로 화제 - 경기 전 주심에게 인사하는 박찬호. 메이저리그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오른쪽 위)전설의 시작 - 1994년 LA 다저스 입단식. ‘61번의 전설’이 시작됐다, (오른쪽 아래)2005년 박리혜씨와 결혼 - 2005년 11월 하와이에서 결혼. 아내 박리혜씨는 박찬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AP, 게티이미지 멀티비츠, 연합뉴스
박찬호가 꿈에 그리던 첫 승을 거둔 날은 1996년 4월 7일. 리글리구장에서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구원 등판해
4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승리투수가 됐다. 미국 땅을 밟은 지 2년 만이었다. 그해 박찬호는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5승5패(평균 자책 3.64점)를 거두며 가능성을 보여줬다.
1997년 박찬호는 잠재력을 꽃피웠다. 두자릿수 승리(14승8패)를 따내며 팀 동료였던 노모 히데오(일본·14승12패)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해부터 박찬호는 5년 연속 10승을 돌파했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대표로 금메달을 따며
병역 혜택을 받은 박찬호는 탄탄대로를 밟았다.
2001년에는 데뷔 후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올스타에 뽑혔다. 몸값도 급증했다. 2001시즌 후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박찬호는 5년간 6500만달러를 받고 텍사스 레인저스로 떠났다. 당시 역대 텍사스 투수로는 최고 몸값이었다.
◇잇단 부상… 시련 딛고 124승
다저스가 '영광의 무대'였다면 텍사스는 '시련의 땅'이었다. 박찬호는 2002시즌 개막 전부터
오른쪽 햄스트링 부상에 시달렸다. 그해 성적은 9승8패였다. 2003년(1승3패)·2004년(4승7패)은 최악에
가까웠다. 다저스 시절부터 그를 괴롭혔던 허리 부상 등이 겹쳤다.
2005년 시즌 도중에 결국 박찬호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 트레이드 됐다. 그해 박찬호는 12승(8패)을 거두며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2007년부터 다시 고난의 행군이 이어졌다. 박찬호는 뉴욕 메츠(2007년),
다저스(2008년), 필라델피아 필리스(2009년)로 옮겨 다녔다.
2009년과 2010년 박찬호는 마지막 선물을 받았다. 2009년 필라델피아 소속으로 첫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았고, 이듬해 뉴욕 양키스를 거쳐 입단한 피츠버그 파이리츠에서 통산 124승째를 올렸다. 노모 히데오(123승)를 제치고 동양인 메이저리거 최다승을 거둔 것이다. 이를 끝으로 박찬호는 17년간 청춘을 바친 메이저리그를 떠났다.
◇아듀 박찬호, 그의 다음 진로는?
지난해 일본 오릭스 버펄로스에서 1년간 선수 생활을 했던 박찬호는 선수 생활의 마지막 무대로
한국 프로야구를 선택했다. 그는 한화 구단이 제시한 연봉 6억여원을 모두 유소년·아마 야구 발전기금으로 써달라고 했다.
KBO(한국야구위원회)가 정한 최저 연봉(2400만원)도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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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age.chosun.com/cs/article/2011/icon_img_caption.jpg朴赞浩跑完19年征程" TITLE="美职棒联盟开拓者
朴赞浩跑完19年征程" /> 꿈을 잃은 청춘에게 보여주고 싶은 18년前 사진 한장… 박찬호 은퇴 선언… 19년간 달려온 ‘코리안 특급’이 종착역에 멈춰 섰다. 미 프로야구에 진출한 한국인 선수 1호, 아시아 출신 메이저리그 최다승(124승·98패) 기록을 세웠던 박찬호(39·한화)가 29일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IMF 환란(換亂)’의 경제 위기에 지쳐 있던 국민에게 힘을 줬던 스포츠 영웅의 퇴장이다. 사진은 1994년 LA 다저스에 입단했을 때 모습.
박찬호를 영입한 한화는 순식간에 최대 관심 구단이 됐다. 전성기가 지났지만 박찬호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뜨거웠다. 올해 초 박찬호의 등판 경기는 7연속 매진 사례를 기록하며 프로야구 첫 700만 관중 시대를 앞당겼다. 불혹을 앞둔 나이에도 박찬호는 녹슬지 않은 실력을 발휘했다. 올해 최종 성적은 5승10패 평균 자책 5.06점. 미국·일본 무대를 포함해 통산 130승(113패)째를 채웠다.
한화 구단은 내년에도 박찬호가 팀에 남아주길 바랐다. 한화 후배들도 한목소리로 박찬호의 잔류를 요청했다. 박찬호는
11월 초부터 3주간 미국에 머물면서 고민을 거듭했다. 개인 훈련을 하다 보니 오히려 지난 몇년간보다 몸 상태가 좋아
은퇴를 망설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결국 박수 칠 때 떠나는 길을 택했다.
박찬호는 30일 오전 서울 중구 플라자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향후 계획을 밝힐 전망이다. 19년간 쉼 없이 달려온
박찬호가 꿈꾸는 두 번째 인생은 무엇일까.